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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5-11-17

조회 31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前略)...이달 그믐날(4월 30일 : 己未)에 임금이 
서쪽으로 떠나갔다. (中略)...임금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떠나가면서, 사당을 맡은 관리에게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앞서 가게 하였는데, 세자의
행차가 뒤따라 나가고 신성군(信城君) 후(珝)와 정원군
(定遠君) 부가 뒤따라갔다. 임금은 군복 차림으로
채찍을 잡았으며, 왕비는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으로
나갔는데, 시녀 수십 명이 따라갔다. (後略)....

-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  에서 발췌

선조임금의 몽진 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무대가

되었던 길, 이승훈과 김대건 신부님이 천주교를 배우고
돌아왔던 길,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이 왜군에게 대패
했던 길, 그 옛날 조선과 중국의 사신들이 오가던 
의주대로의 시작점인 서대문, 즉 돈의문을 나섰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 철로를 놓는다고 서대문을 철거해 
버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적십자병원이 있는
자리 입니다. 너무도 가슴아픈 역사 입니다. 점잖게 
얘기해서 몽진이지 그야말로 비참한 피난길 입니다.
그 날은 하늘도 무심하게 비까지 퍼부었습니다.

전쟁이 나자 선조 임금은 평양으로, 의주로 몽진을 가시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곽재우, 김덕룡, 서산대사를 비롯한 
의로운 조선 의병들이 일어나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성이 탈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장수들의 뼈아픈 조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왜적들과의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명나라의 이여송은 개성으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전쟁 중에 방심
하며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한 장수의 오만함을 볼 수 있는
벽제관 전투 입니다.

길 위에서 만난 역사는 우리에게 [신뢰]라는 메세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국왕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해 선조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 조선 장수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 역사는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상호간의 신뢰는 리더나 팔로워뿐 만아니라 국가간의
국방이나 외교에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므로 진정으로
가슴으로 믿고 따르는 자세에서 나오는 사랑의 힘으로
어떠한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선조임금을 믿고 진정으로 따르는 신하가 있었다면,
구원군으로 왔다며 거들먹거리지 말고 조선의 장수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신뢰하였다면 벽제관 전투에서
패했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군들은 평양성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글 이부경
pklee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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